최근에 들었던 한 목사님의 설교말씀이 몇주동안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함께 나누어 보고자 다이어리를 이용해 적어본다 :)
9월 13일 마커스목요예배모임 에서 김남국 목사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요약해본다.
창세기 22장 1절 ~ 14절의 말씀이다.
요약해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부분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잡아 하나님께 태워드리는 제물인 번제물로 바치도록 시키신다. 이에 아브라함은 그대로 순종하여 이삭을 잡으려하고 이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수양을 준비하여 수양으로 번제를 드리도록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던 이 말씀을 통해 아주 깊게 깨닫게 되고 많은 은혜가 있어서 정리하여 적어본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 하신다
여기서 시험이라는 것은 우리가 늘 그래왔듯
어떤 당락을 결정하는 시험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시험은 연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연단은 확인한다 드러난다의 뜻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가 드러내도록 하는 그런 시험이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왜냐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주저없이 바칠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2절에 보면 굉장히 중요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해 이삭을 사용하신다.
성경본문을 인용해보면
"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 이라고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그냥 이삭이라고 표현해도 될 법한데 말이다. 이를 보면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생명같은 존재 임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은 무엇으로 드러나느냐?
내가 무엇을 붙잡느냐에 의해서 드러난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유일한 내가 아끼는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거기서 내 믿음이 드러난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모든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믿음의 복이 성립하기 위해선 이삭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 하셨는데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을 죽이고 나면
그 약속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드러내셨다.
내가 붙잡고 있던 어떤것 이것 만큼은 절대로 안되요 라고 했던
그것을 하나님이 없애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삶속에서 내 믿음을 어떻게 드러내려 하시는지
알아야 한다. 내가 붙잡고 있는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물어보실지 모른다.
방법은 한가지가 있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께 드려버리는 것이다.
내가 붙잡고 있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나면
내 마음속에 원망이 없어진다. (아멘..)
사람이 언제 강퍅해지고 언제 순종하지 않는가 하면
내가 잡고 있는 것 때문에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어째서 환경이 어째서 그랬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자.
다윗은 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자 였던지 생각해보자.
기름부음 받은 다윗이었지만 그것을 전혀 마음에 담지 않고 살았었기에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것이다.
내가 붙잡고 있기 때문에 원망하게 되고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고 있고 그것만큼은 인정받고 싶고
받고 싶었기 때문에 원망하고 묻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잡으려 하면서 믿음을 드러낸다.
성경에 이삭을 잡으려 했더니 라는 말이 있는데
잡으려 했다는 말은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가축을 도살하다 라는 뜻이 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생명이 주께 있음을 믿었던 것이다.
이삭을 죽인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살리시거나
아니면 꼭 그 믿음의 조상이 되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지키실 것을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삭의 생명이 자기 손에 없었던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실제로는 이삭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이삭을 죽였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주신 생명이고 그리고 이삭으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셨으며 그 조상이 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약속으로 하여금 생겨난 하나님의 자손들, 약속의 자손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 이레라고 칭했던 그 모리아 산은
다윗의 시대에 인구조사를 하고 하나님께 벌을 받게 되는데
그 벌을 통해서 7만명이 죽어갔다고 한다. 이스라엘이 진멸할 상황에 이르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이켜 다윗이 번제를 드리도록 한다.
다윗은 값있는 번제를 사서 드리고 제앙이 끊긴다.
그 번제를 드린 곳이 모리아 땅이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을 짓는 그 땅이 모리아 땅이다.
솔로몬의 성전은 예수살렘에 있고 예수님께서 예수살렘에서 돌아가셨다. 다윗이 값있는 번제를 드린 그 땅,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땅. 그리고 우리가 새생명을 얻은 그 땅이 모리아 땅이다.
여호와 이레 라는 것은 단지 양 한마리를 준비하셨다는 그런 땅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까지 이어져서 나에게 까지 이어지는 그러한 뜻의 여호와 이레이다.
여기까지 잘 알려진 22장의 말씀 내용이다.
내가 은혜를 받았던 내용은 이 이후의 내용이다.
여기서 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볼수 있다..
양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양은 자기가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고 자라다가
어느날 산에서 놀던중 수풀에 뿔이 걸려서 바둥거리던 중
아브라함이 다가와서 양을 잡아 죽여 번제로 드리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너무나도 어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위해서 수년전에
양한마리를 태어나게 하시고 상처없이 잘 자라게 하고
그리고 그 시점에 맞춰서 아브라함과 이삭 주변에서 서성이게 하다가
뿔이 그 곳에서 걸리게 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해보면....
이렇게 정확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하셨다면
그 양 한마리는 얼마나 값지겠는가...
신앙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신앙을 갖길 원한다.
아브라함처럼 놀라운 믿음을 갖길 원하고
이삭처럼 순종하는 믿음을 갖길 원한다.
그렇다면 이삭의 순종은 무엇일까?
그냥 단지 아브라함이 데려가서 잡으려 했기에 순종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그랬을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양에게 있어서 공통점이 한가지 있는데
한가지는 이삭도 그렇고 양도 그렇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서
조금씩 조금씩 준비하여 맞춰나가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의 공통점은 죽음이 다가오는 그 순간까지
이유를 묻지 않는 다는 것이다.
왜 이삭을 죽여야 합니까?
왜 제가 죽어야 합니까?
왜 전 양입니까?
이러한 물음과 의문들이 없었던 것이다.
순종은 내가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 길을 묵묵히 가는것. 순종은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순종은 "알았어 할께~~" 가 아니라 "네" 다.
내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단지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순종의 사람이다.
왜 내가 한국땅에 태어났고
왜 살아가는 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태어나게 했고
하나님을 믿게 했고,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에 있게 했고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이끌어 가심을 믿고 있는가?
그렇다면 네 하자.
아브라함처럼 이삭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이끌어가심을 믿고 있다면 네 하면 되는 것이다.
왜 네 하지 않는가?
죽이기 싫어서? 죽고 싶지 않으니까?
더 많이 살고 싶고 내 것을 주장하고 싶고
그럴싸한 변명도 댈 수 있고 환경 탓도 할 수 있지만
네 해야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함을 우린 믿기 때문에
네 할 수 있는 것이다. 정확한 하나님의 간섭하심을 믿기 때문이다.
이것이 순종이고 이것이 믿음이다.
이해하지 못해도
재수없이 죽어간다고 생각하게 되더라도
나는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퍼즐처럼 맞추어가시는 이 삶에는 결코 실수가 없다.
불만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면...
그곳으로 가자.
양같은 삶을 살길 원한다...
ps. 이 설교 말씀의 mp3 파일은 저에게 있습니다.
듣고 싶으신 분은 메세지 주세요 :)
